아버지,
보고싶은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서서히 온기를 잃어가는 아버지의 발을 만지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나의 입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소리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였습니다. 내가 언제 그토록 애타게 아버지를 불렀던가요? 어릴적 아버지한테 설탕에 묻힌 달달한 꽈배기를 한봉다리 받아들고 마냥 행복해했던 때, 몸이 약했던 내게 좋다고 여름이면 냇가에서 진흙땅을 비집고 나온 미꾸라지를 잡아 탕을 만들어 밥뚜껑에 담아주면 얄밉게도 잘 받아먹던 어릴적 기억속에 아버지는 다정한 모습으로 계셨습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자식들에게도 엄마에게도 사랑의 표현을 할 줄 모르셨던 아버지를 저는 많이 오해하고 미워도 했습니다. 가난의 이유를 아버지의 탓이라 여기며, 아버지가 들이키던 술잔 속에 담겨있던 고달픔의 진실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니 생각조차 하려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한 직장을 30년도 넘게 다니시던 아버지, 미국으로 시집와서 고생하는 딸을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그 흔한 소주도 맘대로 사드시지 못하는 낯설은 땅에 오셨습니다. 20년전 첫째가 세살, 둘째가 한살반때 이곳으로 오셔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될무렵부터 아침이면 운전해서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는 사십오마일 거리에 있는 남편의 사업체에 출근하여 일을 하시고는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데려오고 온갖 과외활동을 데려다 주는 반복되고 분주한 일상을 둘째가
11학년이 될 때까지 해주셨지요. 엄마는 집안 살림을 아버지는 운전과 회사일을 해주시며 우리 인생의 텃밭에 밑거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처음 발병을 한것도 뜨거운 여름 아이들을 데리러 차에 오르셨을때 차안의 열기로 인해 폐에 무리가 와서 폐가 마치 찌그러진 깡통처럼 순식간에 쭈그러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차레 폐 수술을 받아 아버지의 가슴엔 커다란 수술자국들과 함께 응급실과 입원을 반복하는 7년이라는 고난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숱한 고비를 넘겼지만 꼿꼿한 성격대로 일어나시곤 했던 아버지, 삼년 가까운 세월을 양로병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