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엔 빨간색 색종이를 겹으로 오려 만든 카네이션꽃을 엄마 가슴에 달아드렸던 어릴적 생각이 난다. 서툴지만 정성 들여 만든 카네이션을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고 하루를 보내시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여겼던 그 때의 엄마는 통통하게 볼 살이 오른 예쁜 아줌마였는데, 이제 우리 엄마는 칠십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되셨다.
가난했지만 자식 셋을 공부시키기 위해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엄마는 봉제 공장에 취직을 하셨다. 그때만해도 엄마들은 집안일하고 아이들 돌보는게 전부 였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맞아주는 엄마가 없는 집이 어찌나 싫은지, 두 살 아래 남동생은 내가 올때까지 담장에 앉아 기다리곤 했다.
엄마가 공장에 다니는게 창피하고 속상해서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는 수출하는 회사에 다닌다며 둘러 대던 철없던 시절, 엄마가 퇴근할 때쯤 되면 공장 밖에서 기다리다 나오지 않는 날은 12시가 넘도록 야근 하는 날이었다. 힘없이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공장의 담장따라 이어진 길이 어찌나 멀고 길었던지....
한번은 엄마를 만나러 갔었는데 수위실에서 면회는 안된다며 만나지 못하게 하자. 얼마나 속상한지 " 아저씨,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가 저라면 어떻겠어요?" 하면서 한 마디 해주고 왔는데 퇴근후에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 아이구, 아주머니 딸 똑똑하네요. 나를 훈계하고 가네요. 입장 바꿔서 생각하라구..."
지금 생각하면 맹랑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땐 정말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랬던것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직장 생활로 두 살 터올의 삼남매는 대학을 졸업하고 오빠와 남동생은 시간을 맞춰 교대로 군대를 다녀오고 친구처럼 애절했던 엄마를 떼어놓고 미국으로 시집 올 때쯤에야 엄마의 직장 생활은 끝이났다.
같이 살면서도 늘 그리웠던 엄마와 헤어져 지내던 처음 오 년,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리움에 울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애틋한 모녀의 정을 성모님께서도 아셨는지 십 여년 전 부모님을 이 곳에 모셔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엄마는 집안일 외에 가장 예쁜 꽃은 늘 성모님께 바치며 좋거나 슬프거나 성모님 앞에 앉아 푸념처럼 바램을 기도로 이야기 하신다.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살아가는 이치를 알려주시며, 언제나 나누라고 늘 애기해주시는 엄마. 난 지금도 가끔씩 애기한다. " 엄마, 내가 어릴적부터 엄마 없는 집에서 살림하고 살았으니까 엄마가 나한테 해주는거 다 보속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해요. 알았지? 참, 하느님은 공평 하시다니까. "
오늘도 다섯시 반을 여섯시 반일 줄로 잘못보고 깜짝 놀라 일어나 정신없이 도시락을 준비 했다는 엄마의 바쁜 손놀림을 뒤로하고 나서는 출근길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엄마, 우리 엄마, 사랑해요. 오래 오래 나랑 같이 살아야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