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하는 말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자동차 전문가는 자동차를 잘 알고, 법의 전문가는 법에 대해 잘 압니다. 전문가들은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권위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을 만든 분이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알겠지요. 사람을 만든 분, 바로 하느님이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아십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1독서. 예레 1,5)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물건이 고장이 나면 그 물건의 전문가에게 가야 하듯이 인생에서 문제가 생기면 인생의 전문가인 하느님께 가야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복음. 루카 4,21)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데 어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이 말씀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성경 구절은 이사야 6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으로써 예수님 오시기 훨씬 전에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사야 서에 예언된 ‘주님’ 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직접 그 성경 구절을 읽으시니 그 말씀을 듣는 지금 여기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을 만드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여기 ‘듣는 가운데’ 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복음. 루카 4,22)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지어내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님은 그들을 알지만 그들은 선입관과 교만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면서 곧잘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까지도 판단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2독서. 1코린 13,4-5)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들은 친절하지 않고, 무례하며, 시기 질투하고, 교만하며, 앙심을 품고 있고, 성을 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벼랑 위로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지만 사랑의 반대인 무관심은 사람을 죽입니다.
반면에 엘리야 시대의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방인들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가난과 병으로부터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누립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통하는 통로입니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할 때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트남 공산 치하에서 13년간 감옥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해방을 체험한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죄수들은 교도소에서 풀려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작정했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미래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저를 덮칩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미래를 생각합니까? 저에게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소중합니다. 미래는 제 영혼 속에 거처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제 능력 밖에 있습니다. 어떤 것을 바꾸거나 수정하고 보충할 수 있는 제 능력 밖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속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립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이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도 온전히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오늘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며 모든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