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1독서 창세 22,1-2.9ㄱ.10-13.15-18
2독서 로마 8,31ㄴ-34
복 음 마르 9,2-10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복음. 마르 9,7)
아기는 엄마 음성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엄마는 아기 얼굴을 볼 때 가장 행복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 앞에서 아기 같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하고, 하느님은 사람의 얼굴을 볼 때 가장 행복합니다. 아기와 엄마가 하나이듯이 하느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새하얗게 빛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된 이 신비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모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말을 들음으로써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안 계신 데가 없고 못하는 일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람의 몸을 취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의 삶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십니다.
일상의 삶은 마치 자연의 섭리와 같습니다. 자연에서는 밤과 낮이 교차하고 봄여름가을겨울이 바뀝니다. 햇빛이 좋고 맑은 날도 있지만 흐리고 비가 오는 날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어떨 때는 태풍이 불기도 합니다.
자연의 섭리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은 편한 것, 좋은 것,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바라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만 받고 저것은 거부한다면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실 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 여기 있습니다.”(1독서. 창세 22, 1)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겠다는 아브라함의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하실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한껏 축복을 베푸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2독서. 로마 8,32)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느님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모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 여기 있습니다.” 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이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여기, 있습니다.” 라는 대답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