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1독서 사도 3,13-15.17-19
2독서 1요한 2,1-5ㄱ
복 음 루카 24,35-4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복음. 루카 24,47)
모든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귀향 본능, 동물에게는 귀소 본능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 라는 말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그 원래의 자리가 종교마다 다르게 표현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믿음에서 사람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하느님입니다. 원래는 하느님과 하나였는데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려는 것이 본능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되고자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는 목숨을 바쳐서 라도 자식을 살리려고 하듯이, 사람을 내신 하느님께서는 죄 때문에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죽게 하심으로써 죄로부터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써 예수님을 죽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1독서. 사도 3,15)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복음. 루카 24,48)
증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고 듣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자리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복음. 루카 24,36)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아무 문제가 없어야’ 누리게 되는 평화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야’ 누리는 평화는 조건적인 평화입니다. 그런 평화는 죽음 앞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문제가 있든지 없든지 누리는 평화입니다. 가난해도 평화롭고, 슬퍼도 평화롭고, 박해를 받아도 평화롭고, 죽어도 평화로운 평화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만약 하느님께 가난이 걸림돌이 되고, 슬픔이 걸림돌이 되고, 박해가 걸림돌이 된다면,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지 못하신다면 하느님은 불완전한 하느님이 되고 맙니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난 후 제자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깥 상황이 좋아져서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가 그들의 내적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도망갔던 제자들은 이제 용감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대사제들은 여전히 제자들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들었던 예수님의 목소리를 성경 안에서 듣고, 제자들이 만났던 예수님을 성경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 편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2독서. 1요한 2,1)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에 머물러야 합니다.
말씀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성경을 몸 전체로 읽어야 합니다. 세포가 알아듣고 피가 알아듣고 뼈가 알아듣게 해야 합니다. 천천히 반복해서 깊이 새기듯 읽어야 합니다. 회개는 성경을 읽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 뜻도 새기지 않으면서 읽는 말씀은 ‘수박 겉 핥기’ 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액세서리 신앙으로는 삶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며 예수님을 증거하지도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