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1독서 이사 56,1.6-7
2독서 로마 11,13-15.29-32
복 음 마태 15,21-28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을 괴롭히는 마귀와 고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역설적으로 마귀가 이 여인을 예수님께 가게 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2독서)
마귀는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힘입니다. 마귀의 힘은 결코 하느님의 힘을 이기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귀로 인해 믿음은 더욱 굳세어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마귀의 덫에 걸려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순금을 얻기 위해서는 원석을 불에 넣고 녹여야 합니다. 우리 믿음은 순금이 되기 전에 온갖 불순물이 함께 뒤엉켜있는 원석과 같습니다. 우리 믿음이 순수해지기 위해서는 풀무질이 필요합니다. 순수한 믿음을 위한 풀무질은 시련입니다. 믿음은 시련을 겪어내면서 순금처럼 순수해집니다.
가나안 여인은 모진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이 마귀에 들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시련이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까지도 이 여인을 강아지 취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여인을 무시하고 모욕을 주시는 것일까요? 바로 이 여인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딸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딸이 낫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딸이 낫기를 소망하는 여인의 바람이 원석이라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순금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순수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순수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시련이 필요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이 낫기를 바라지만, 예수님께서는 딸이 낫기에 앞서 이 여인의 믿음이 순수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좋은 것을 바라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가 무시를 당하고 모욕을 받을 때는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표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우리가 무시를 당하고 모욕을 받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무시와 모욕을 통해 예수님께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무시와 모욕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그녀는 스스로 강아지라고 인정함으로써 겸손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 순간 그녀는 오롯이 하느님으로 힘으로 채워집니다.
무시와 모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자존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죽이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번제물이 되고 희생제물이 됩니다.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1독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결코 무시와 모욕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마귀에게 이기는 무기는 겸손입니다. 낮아지고 약한 사람 안에는 마귀가 살지 못합니다. 낮아지고 약한 자리는 예수님께서 사시는 자리이고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자리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라.’, ‘낮은 자리에 앉아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은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무시와 모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