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그러므로 설령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짓고 멸망하기를 바라시지 않고,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자기만 누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만이 누리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을 누리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회개를 도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1독서. 에제 33,8)
죄를 짓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한 때는 착한 사람이었으며, 우리 중의 한 사람입니다. 나 또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죄인과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복음. 마태 18,20)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사시는 육화하신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은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부유하고, 분쟁 중에서도 평화로우며, 슬퍼도 행복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2독서)
사랑이 없으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가식이며 기도는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계명을 잘 지키고 기도도 열심히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신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바리사이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누구나 자기 몸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그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그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등등. 이렇게 관심을 가지면서 너와 나는 하나가 되고 그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사시게 됩니다. 참행복은 거기에 있습니다.
환경도 이웃입니다. 이웃인 환경을 사랑하지 못한 탓에 코로나19가 생겼습니다. 일회용을 줄이고, 세제를 줄이고, 쓰레기를 줄이고, 자연을 보호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