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1독서 이사 52,7-10
2독서 히브 1,1-6
복 음 요한 1,1-18
Merry Christmas! 성탄 축복을 빕니다!
Christmas는 라틴어 Christos(그리스도)와 Mas(Mass 미사, 경배)의 합성어입니다. 스페인어로는 Feliz Navidad(펠리쓰 나비닷), 프랑스어로는 Joyeux Noel(조이유 노엘)입니다. 간혹 X-mas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데, ‘X’는 그리스어의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의 머리글자로써 영어 ‘Christ’의 ‘Ch’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X-mas’는 ‘엑스-마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선포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복음. 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말은 강생(降生), 육화(肉化, incarnation)를 뜻합니다. 칼 라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탄은 고백이며 믿음이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예’ 라고 대답한다면, 정말로 성탄이 일어난다. 그러면 하느님이 몸소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이 세상 안으로, 베들레헴으로 들어오셨듯이, 원래 하느님의 것인 우리 마음속으로도 오신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나는 너의 시간이다. 나는 네 일상의 황량함이다. 나는 너의 눈물이다. 내 안에서 울어라, 내 아이야. 나는 너의 기쁨이다. 나는 네 길 위에 있는 막다른 골목이다. 네가 어디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곳, 거기가 네가 이미 나에게 와 있는 곳이기에. 네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나는 너의 두려움 속에 있다. 나는 네 고난 속에 있다. 내가 괴로워했기에. 나는 너의 깊디깊은 추락 속에 있다. 나는 너의 죽음 속에 있다. 내가 태어난 거기서 오늘 너와 함께 죽기 시작했기에. 너, 가련한 사람아, 성탄을 기념하고 거행하려거든 오직 한 가지, 이것만을 나에게 말해다오.’ ‘당신이 여기 계십니다. 당신이 오셨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 속으로 오셨습니다. 내 영혼 안으로도. 스스로 용서하지 않으려는 내 분노의 변덕 뒤로도.’ ‘사람아, 이 한가지만을 말해다오.’ ‘당신이 여기 계십니다.’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마라.’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내 사랑은 이후로 쓰러지지 않는다.’ ‘내가 여기 있다. 성탄이다. 영원히 머무를.’”(K. Rahner)
우리 가운데 사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십니까? 예수님은 ‘캄캄한 밤’, ‘작은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 말 구유’ 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처음으로 경배한 사람은 ‘가난한 목동들’ 이었습니다(루카 2,1-14). 이러한 예수님 탄생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가난, 어두움, 더러움, 추위, 보잘것없음 등 우리가 피하고 싶은 상황을 통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낮아지고 작아지고 약해지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빛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각자 자기 자신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어야 하는 소명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져서 겸손해질 때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빛이 세상에 비추어집니다. 반면에 우리가 강해지고 교만해질 때 하느님의 빛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빛을 내려는 것이고 결국 그 빛은 참빛이 아니라 어둠이 됩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낮아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덴마아크 코펜하겐에는 매우 훌륭한 예술품으로 알려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몰려옵니다. 어떤 예술가 한 사람이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특별한 그림도 아닐 뿐 더러 잘 그린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친구에게 그 그림을 보고 실망했다고 말하자 그 친구는 무릎을 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그림을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술가는 다시 가서 예수님 초상 앞에 무릎을 끓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자애와 겸손함이 그림에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 중에 으뜸가는 덕목은 겸손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난, 불명예, 추위, 불편, 더러움 등등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그 자리는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으로 인해 그 자리는 거룩한 가난, 거룩한 불명예, 거룩한 추위, 거룩한 불편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겸손해질 때 예수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강생하시는 것이며, 우리의 겸손은 우리 자신을 비추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