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이와는 관계없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에서는 그 시기를 준비하라는 말씀이 성서 이곳저곳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알 폰스 말티-뉴(1790~1869)란 사람은 “인생이란 죽음으로 시작되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그 삶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한들 다음에 오는 사후에 삶 앞에서는 허무하며 그러한 삶은 죽음이란 본론의 서론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을 어느 책에서 읽을 기억이 희미하게 생각난다. 오늘 나는 이 뜻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을 했다. 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잠시도 견디기 어려웠던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문득 이 견디기 어려운 시간의 연속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임이 아니라 그 끝이 있는 유한한 고통의 시간임을 깨달으며 그 고통에 감사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의 때를 모르게 해주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각자 죽음의 때를 알고 살아간다면 그 시간의 도래하기 전에 아마 모두 그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아가게 되며 그 죽음의 때에 이르기 전에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90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언제나 나도 그 시기를 기준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내가 올해로 90세 그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건강하다. 현재에도 내손으로 밥을 해서 차려먹고 있으며 일상의 생활도 주위의 도움 없이 해 나간다. 이것은 내가 건강하다기 보다 주위 환경이 그렇기에 내가 해 나가는 것이리라. 초저녁 경엔 온 몸이 풀려 꼼짝 못하는 육체로 때가 온 것임을 각오하는 것이 요즈음의 매일 매일의 일상이다. 저녁이 되면 주님께 하루를 결산하는 제출서를 주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저녁 기도를 하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다. 아침에 다시 눈을 뜨면서 오늘 이 하루 24시간을 다시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아침 기도로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말복도 지나고 추석도 지나는 캘린더를 보면서 아마도 금년 한 해를 지나게 될지 모른다고 살며시 미소 지은다. 나이와 관계없이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그러나 도중에 떠나게 될지 모른다는 기우에 중단했던 그림 그리기, 글쓰기, 책 읽기 등을 다시 해볼까? 하는 마음이 일기도 하고, 또 중간에 그만 둔다고 누가 뭐라고 할까?, 아니 그때까지 만이라도 계속하면 되는 거지 하는 게 요즈음 생각이다. 사랑해요. 수고했어요. 등 그동안 어머니에게, 아이들에게 못하고 안했던 말들을 지금부터 아끼지 말고 해야지 하고 결심을 한다. 그래 오늘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