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탈출 1, 1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 34-37)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의 야훼 신앙은 실질적인 해방의 시간, 이집트로부터의 빠스카의 기억을 잊지않고, 기억에서 삶으로 이어가는 새로운 다짐이며, 현재의 시간안에서도 그대로 그 사건을 재현해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경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관, 생활의 중심에 야훼께 대한 온전한 신뢰는 그 빠스카의 해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신앙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를 통해서 경험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억을 토대로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다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태오 복음 저자는 예수님을 모세를 잇는 예언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런 예수님을 거부했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율법이나 기존의 이스라엘의 전통과 그들의 오랜 생활양식을 거부했던 분인가? 물론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일깨우시는 비유로 평화의 진정한 의미, 거짓과 위선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랑의 실체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관계안에서 거짓됨과 가식됨은 때로 사랑의 이름으로 고통과 상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기때문입니다.
사랑의 참된 진실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만큼의 인내와 기다림이 동반됨을 잘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보면 완벽하다 할 만큼 가족간에, 형제들간에 아무런 문제없이 오로지 사랑만이 넘쳐나는 가정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말 못하는 아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예수님 말씀의 지혜와 사랑의 방법으로 마음의 상처와 영혼의 메마름들로부터 벗어나는 체험을 하는 한주간이 됩시다.
영적 독서
1. 집회 1, 1-10 지혜의 신비
2. 로마 8, 18-30 고난과 희망과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