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영이와 나는 동갑인 동네 친구였다.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와 석영이의 아버지는 친구 사이였다. 엄마 또한 석영이 엄마와 친구였다. 두 부부는 주말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어느 해 오토바이를 타고 성묘를 다녀오시던 중 교통사고로 아저씨는 한쪽 다리를 잃었고 아줌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고는 양쪽 집안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석영이는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세명의 동생들을 돌보며 엄마의 몫까지 감당해야 했다. 밝은 성격의 석영이는 힘든 상황도 잘 받아들이며 맏이의 역할을 잘해 나갔다.
내가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온 후 소식이 뜸해졌지만 몇 년 전 남편의 중국 출장길에 동행하여 석영이를 만났다. 석영이는 쑤저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함께 간 중국인 일행까지 초대받아 한국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중국에서 맛 본 한국 음식이 얼마나 맛있던지, 석영이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님들끼리 둘 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석영이와 나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처음으로 각자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어려웠던 우리 집안 형편에 비해 석영이네는 여유가 있었다. 그 점이 나는 많이 부러웠다. 석영이 또한 나에 대해 거리감을 느꼈다고 한다. 석영이 부모님이 늘 나를 칭찬하셔서 나에 대해 불편한 맘이 들었다고 한다. 직장을 다니셨던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돕는 내가 그분들께는 기특하게 여겨졌었나 보다. 우린 서로 다른 이유로 친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로 우린 오랜 친구를 다시 찾은 마음이 들어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던 중 석영이의 페이스 북에 올라온 내용을 보게 되었다. 석영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친구가 만든 책인 것 같았다. ‘벗들의 그림을 꽃마차에 가득히 싣고’ 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석영이에 관한 그림과 글도 실려 있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그대로 간직된 글과 그림들이었다. 석영이의 한 친구는 그 책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다 등 제목에서부터 웃음이 나왔다. 내심 심각했던 유년의 기억들을 그 안에 담고 있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술을 좋아하셔서 매일 막걸리 한 통을 드신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두 분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셨을 텐데... 얼마 전에 동영상으로 엄마와 아저씨를 만나게 해 드렸다. 주름 가득한 얼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색한 대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또 물으셨다.
미국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부모님의 세례명은 바오로와 수산나이다. 친구 부부를 기억하며 그분들의 세례명으로 정하셨다. 아줌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석영이네 가족은 냉담 중이다. 마음은 성당을 향하지만 발걸음은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무는가 보다. 아줌마의 기일이 되면 석영이네 가족과 함께 바쳤던 뜻도 모르는 연도. 구성진 가락에 담긴 구절이 부모님을 신앙으로 이끌게 된 것 같다. 매일 아침 먼저 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엄마의 기도 속에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