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 동방의 현인 老子께서는 ‘自由人’이 되는 것을 “나비의 꿈”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원 뜻은 좀 더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 담겨 있었겠지만, 오늘 우리 현대인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道를 깨닫는 길이란 눈에 보이는 현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높은 하늘로 날아 오른다는 비유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누에고치라는 단단한 굴레에 갇혀 미래를 보지 못하는 애벌레를 벗어나, 한마리 나비가 되어 새로운 하늘과 땅으로 날아 오른다는 비유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몇차례씩 이러한 차원의 변화에 도전하는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도 생각 됩니다.
오늘 저희 아그네스성당 가족들은 이별의 아픔 속에 큰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저희들 마음 속에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시고, 물주어 기르신 신부님께서 갑자기 한국으로 떠나가시니 마음으로 보내지 못하는 안타까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이란 어떤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이런 만남은 헤어지는 슬픔을 전제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일찍이 어느 영성가가 말하기를 “세상의 고통이란 거의가 상실의 고통이다, 즉 내가 따뜻하게 품고 있던 마음의 보물을 잃을 때, 낙심, 실망의 마음이 우리를 짓누른다. 하지만 좀 더 깊은 묵상을 갖을 때, 우리가 아꼈던 마음의 보물이 원래 나의 것도 아니었고, 허상이지 실체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그 보물이 떠나감으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더 큰 축복이 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기실 낮과 밤 만큼이나 동전의 양닢같이 만물의 운행의 질서에서 비롯된 것, 좀 더 초연한 마음으로 받아드릴 때, 이별의 아픔도 새로운 만남을 예비하는 하느님의 ‘위장된 축복’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한편 과학도의 눈으로 살필 때, 우주 만물이란 끝 없는 운동과 변화가 그 존재의 본체라고도 보겠습니다. 세상에 정지상태가 있을 수 없음을 일찍이 서양의 현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도 그의 고백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신 영원한 현재이신 하느님 안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을 단풍이 한창입니다. 파란 하늘, 맑은 공기,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지난 여름 준비한 풍성한 녹음이 어느덧 빨갛고 샛노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낙엽으로 지고 쌓여서, 이윽고 본래의 자연,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어둠이 내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동편에 해가 떠올라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듯이, 생성 변화 소멸이라는 순환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절망의 한가운데 항상 새로운 희망과 새 아침을 마련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남가주에는 추운 겨울이 없기 때문에 새봄을 맞는 환희가 없습니다만, 그래도 봄이 오면 야산 여기저기에서 개나리, 진달래꽃 (여기서는 Poppy꽃)을 만나게 됩니다. 훈풍과 함께 어디선지 노랑나비가 날아오고, 그러면 새봄의 생명의 축제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우리 눈으로 살핍니다.
단단한 고치의 굴레를 벗어나 한마리의 노랑나비가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우리 맘에 깃든 오늘의 아픔이 정화되어,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희망”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더욱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땅을 향해 출발하시는 신부님의 새로운 나날이 항상 푸른 하늘 같아지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