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민수 24, 17)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마태 21, 25-26)
복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 중에 하나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유대지도자들 사이에 갈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의 치유와 많은 이들이 얻은 위로 그리고 아버지를 섬기는 지혜와 진정한 사랑의 의미들은 쉬운 가르침을 통해 그 만큼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유다인들이 가정과 종교적 문화를 통해 일상안에서 지켜왔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진정한 사랑과 참된 인간적 연민으로 감동을 주기에 충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누려왔던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선뜻 가난하고, 진실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나누기에는 용기도 부족했고, 진심어린 마음의 변화까지 불러오기에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오랜시간 기다려온 메시아의 구체적인 모습과 연결시키려는 희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속마음을 들추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대림시기에 나름대로 준비해 가야할 마음 가짐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창조주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고,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는 그분의 시선에 걸맞는 응답을 어떻게든 준비해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순수함과 세례자 요한 닮은 열정이 결여된 모습은 어울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