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묵주 반지를 처음 본 것은 중학생 때였다. 늘 함께 다니던 친구 채연은 십자가가 그려진 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빙빙 돌아가는 특이한 반지였다. 채연은 반지에 담긴 의미를 얘기해 주었다. 묵주 기도는 천주교인이 하는 기도로 반지를 통해서도 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반복되는 기도문을 한참을 바쳐야 하는 어려운 기도 같아 보였다.
몇 년 후 채연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채연은 학생 레지오라는 천주교 신심 단체에 가입했다. 작은 소책자를 늘 들고 다니며 묵주 기도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까떼나, 쁘리시디움 등 레지오에서 쓰는 용어에 대해 자주 얘기했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다만 오래된 채연의 은 묵주 반지만이 낯익을 뿐이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십 대 초반의 젊음이 겪는 첫 시련 앞에서 나는 비로소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속에 날 깨우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뭐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오랜 세월 내 마음에 자리 잡았던 성모님의 옷자락이 내 앞에 놓인듯했다.
결국 나는 채연이 다니는 성당을 나갔다. 교리반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채연이 활동하는 청년 레지오에 가입하였다. 처음 함께 바쳤던 묵주의 기도는 어려웠다. 하지만 비로소 묵주 반지에 담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병원 일을 마치고 어둠이 내린 성당에 함께 모여 바치는 묵주 기도와 주회합에서 청년들을 만났다. 점차 그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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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이면 성당 외부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였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불합리한 사회 구조속에 놓인 소외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중복 장애의 고통에 놓인 사람들과 봉사자들의 공동체도 접하게 되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며 몸까지 뒤 틀어진 덩치 큰 아이가 나에게 안길 때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때론 그들과 함께하는 힘든 노동의 날들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내 안의 자만이 무너져 갔다. 그 시간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치유의 여정이었다.
주일이면 친구들과 어울렸던 예전의 날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로 인해 친구들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열악했던 장애인 시설들을 접하며 나눔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그 시간은 내 인생의 새벽이었다.
교리 공부를 마치고 세례를 받던 날 채연은 나의 대모로 함께 있었다. 집안에서 처음 세례를 받던 내게 부모님은 금으로 된 빙빙 돌아가는 묵주 반지를 선물해 주셨다. 그 후 시도 때도 없이 묵주 반지를 빙빙 돌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수시로 바치는 성모송은 평안한 마음을 되찾게 해주는 내 마음의 보석과 같았다.
주변의 나무들이 연녹색으로 물들어 가는 5월은 성모 성월이다. 사람들은 향기로운 장미 화관을 어머니 머리에 씌워 드린다. 하지만 장미의 가시는 성모님의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기도 하다. 하느님께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온전한 순명이었다. 인간적인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담긴 숭고한 사랑이 영광의 신비로 이어지는 성모님의 생애를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