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형제밖에 없는 나는 어릴 때부터 자매가 있는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하며 자랐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남자 형제들과의 우애도 돈독했었는데 결혼 후 미국에 살면서 지리상의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 또한 멀어지게 되었다.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오랜 바람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성당에 매주 토요일에 하는 한글학교가 생겨서 두 아이를 그곳에 보냈다. 아이린은 아이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왕따를 당했고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피해 의식에 스스로 벽을 쌓고 지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얼굴도 모르는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첫말은 내 아이가 처한 부당함에 대해 얘기했으리라 그러나 그 이후의 내가 토해낸 말들은 내 안에 쌓였던 설음과 분노였다. 한 시간도 넘게 언니는 내 말을 다 들어주었고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낯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온 건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언니는 그 상황에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렇게 언니와 나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얼마 후 언니가 고등학교 이 년 선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얻은 듯이 내 편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음에 감사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내 삶 안에 언니라는 방은 쉼터로 자리 잡고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허우적거리다 보면 하루가 가고 어느새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리고 이 년..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지만 언니와 나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조금씩 쌓아 올려진 돌멩이가 바람을 맞으며 탄탄하게 세상을 향해 서있는 것처럼 신뢰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이를 흘러갔다.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서 만날 때면 우린 늘 함께했고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닮아서 친 자매인 줄로 착각하기 일쑤였다. 신앙과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인간적인 실망감에 힘들고 지칠 때면 서로를 다독여주며 고단한 삶의 한 부분을 함께 나누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느낌을 안다. 얼굴을 떠 올리면 그냥 미소가 퍼지는 그런 관계,너무 포개져 서로의 자리를 버겁게 하지 않는 우리 사이의 공간조차도 소중함으로 받아들인다.
코로나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현실에 신앙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며 언니를 만날 수 없는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음에 한숨이 나온다.
어느 날 남편이 질문을 했다. 몇 달째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데 누가 제일 보고 싶냐고,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언니가 제일 보고 싶다고.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는 이 상황이 너무 길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다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