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사는 동네에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무슨 이유인지 나를 볼때마다 괴롭히곤 했는데 어느 날 나는 그 아이에게 매를 맞고 코피를 펑펑 흘리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은 코피 흘리는 나를 보더니 화가 나서 바로 그 아이를 찾아가서 때려주었다. 그 후로 그 아이는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때가 초등학교 2,3학년 때쯤거 같다.
내가 어릴 적엔 종이 인형이 유행해서 종이에 인쇄된 인형과 옷 그리고 장식품 등을 오려서 옷을 입히고 신발을 갈아 신기며 놀곤 했는데 위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있는 나는 함께 인형 놀이를 하며 놀아줄 형제가 없어서 집에선 늘 혼자 인형 놀이를 하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왔는데 동생이 쑥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새로 나온 종이 인형이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가며 사느라 창피해서 혼났다는 동생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두 살 아래인 동생은 어릴 땐 나와 등치가 비슷했는데 직장 생활을 하시는 엄마가 늦게 오시는 날엔 동생을 세숫대야 앞에 앉혀놓고 얼굴을 씻겨주곤 했는데 싫다고 하면서도 얼굴을 내미는 동생의 커다란 얼굴을 씻겨주던 누나 노릇을 잘 받아주곤 했다.
낮에 학교에서 제일 먼저 돌아오는 초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기 싫다고 오빠와 내가 올 때까지 담장 위에 앉아있곤 했는데 나 역시 어린 나이었지만 그런 동생이 가엾게 느껴지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경기도에서 주관하는 미술 대회가 있었는데 참가비를 내야만 그림을 제출할 수가 있었다. 나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엄마에게 보여 드렸고 엄마는 너무 잘 그렸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동생도 그림을 한 장 그렸는데 엄마는 돈이 없다며 잘 그린 나에게만 그림 참가비를 주셨다. 학교에 가는 동안 동생은 내내 툴툴거리며 자기도 그림을 제출하고 싶다며 무척 서운해했다. 나는 동생에게 엄마에게 받은 돈을 건네주고 내 그림은 제출하지 않았다.
그 후 동생은 그 그림으로 경기도지사 상을 받고 기쁜 얼굴로 커다란 트로피를 흔들며 집으로 뛰어왔다. 그때 일은 두고두고 동생을 위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동생과의 어릴 적 추억은 아득한 과거로의 여행으로 미소를 짓게 한다. 8년째 해외 지사로 나가 있는 동생은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더니 아버지 기일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미국에 왔는데 “남들은 놀러도 잘 오더라..” 하는 말이 마음을 찌르는 듯했고 난 그 자리에서 “다음 달에 싱가폴 갈 게” 하고 말하였다. 반신반의하는 동생의 표정에 확신의 뜻을 알리며 싱가폴 방문은 다음달로 정해졌고 난 그 약속을 지켰다.
작지만 친환경적인 도시 구조와 생활의 편리함이 함께 공존하는 싱가폴의 거리는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고 도시 안에 있는 식물원은 마치 코스타리카 정글 안에 들어온 것같은 느낌을 주었다. 금융의 나라답게 분주하고 그 사이를 누비는 사람들은 세련된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마리나 베이 샌드 호텔에서 내뿜는 밤의 레이져는 말로는 푠현하기 힘든 화려한 불빛에 넋이 빠지는 듯했다. 우리 일정이 빠듯하여 짧은 시간 뭔가를 더 많이 보여주고 싶어 여기저기 바삐 다니며 싱가폴의 명소를 안내하는 동생 부부가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어는새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동생의 어깨가 무거워 보여서 어릴 적 쨘하게 느껴지던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십여년이 넘게 헤어져 사는 동생과의 긴 시간 사이에 어린 시절 함께하며 울고 웃던 날들이 도시의 화려한 빛보다 더 아름답게 우리 남매의 마음속에 초롱불로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