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
1독서 이사 50,4-7
2독서 필리 2,6-11
복음 마르 14,1-15,47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복음. 마르 14,8)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자 주위에 있던 몇 사람이 값비싼 향유를 허투루 쓴다고 나무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복음. 마르 14,8)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을 똑 같이 받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과 같이 똑 같이 죽어라 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눈, 귀, 손, 발 등 몸의 지체는 각기 해야 할 역할을 할 뿐이지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손이 발의 역할을 한다면 몸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실 따름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알고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함으로써 예수님의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여인은 그저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복음. 마르 14,6)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예수님께서 다 해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면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바른 여인처럼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거룩한 일이 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셨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기도하여라.”(복음. 마르 14,34) 우리가 누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앎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이신 성부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알고 온전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복음. 마르 14,36)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룰 때 모든 것을 갖게 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 이었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복음. 마르 15,34)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없애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고통을 받아 안을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을 없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받아 안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히 우리에게 닥치는 수치와 부끄러움, 억울함과 불의 등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1독서. 이사 50,7)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똑 같이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당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충분하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2독서. 필리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