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
1독서 사도 10,34ㄱ.37ㄴ-43
2독서 콜로 3,1-4
복음 요한 20,1-9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화답송. 시편 118,24)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날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님 예수님 만이 마련하실 수 있는 날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이 헤아릴 수 없는 은총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를 일상의 삶으로 살아감으로써 얻게 되는 은총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 되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복음. 마르 20,1)
스승이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돌아 가시자 제자들은 절망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몰래 숨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주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것은 주님 부활을 확인하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도 역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복음. 요한 20,2)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을 할 리가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 부활에 대한 믿음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 주님을 향한 사랑만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죽었지만 그 죽음을 초월해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살아있는 주님으로 존재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절망감과 두려움 때문에 꼼짝 않고 숨어있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 앞에는 절망감도 두려움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경계도 이미 허물어졌습니다. 설령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거나 말거나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 안에는 주님께서 영원히 살고 계십니다.
주님 부활은 죄 많은 우리가 죽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 즉,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우리도 꼭 죽음 후의 부활을 바라고 살지 않아도 됩니다. 매일의 삶 안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살면 부활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부활을 목적으로 사는 삶은 이미 부활 신앙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화답송. 시편 118,22-23)
사람 눈에는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일을 통하여 주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먹고 마시는’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 계십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1독서. 사도 10,41)
부활절은 주님 부활의 은총을 찬미하면서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좋아하는 일이 생길 때만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 부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같은 사소한 일을 통하여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부활 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2독서. 콜로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