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복음. 마르 12,43-44)
엘리야에게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가난한 과부에게 하느님은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는’ 축복을 주십니다. 엘리야의 말을 믿고 따른 가난한 과부의 생을 하느님께서 보장해 주십니다(1독서. 1열왕기 17,10-16).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 값으로 당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2독서. 히브 9,24-28). 소중한 것을 바치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 없는 봉헌은 남아서 주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거룩한 척 기도하지만, 남보라고 기도하고 더구나 가난한 사람의 가산을 등쳐먹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책을 받습니다(복음. 마르 12,38-44). 예수님은 사람의 외면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지향을 보십니다. 가난한 과부는 보잘것없이 보이는 동전 두 닢이지만 생활비 전체를 봉헌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생을 보장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창하게 보이는 일도 지향이 올바르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에게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올바를 지향으로 하면 그 일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1독서와 복음에서 보이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입니다.
작고 사소한 일 하나라도 사랑으로 행해질 때 그것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합니다. 사랑을 위해서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한 영혼을 회개시키는 것은 한 우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핀 한 개를 줍는 것 같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올바른 지향(사랑, 희생)이 들어 있으면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주었지만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여덟 명이나 있는 가족이 오랫동안 굶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쌀을 가지고 그 집을 찾아 갔습니다. 아이들의 엄마는 쌀을 받자 마자 반으로 나누더니 그 쌀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돌아온 그 엄마에게 어디를 갔다 왔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옆집 사람들도 굶고 있어서요.”
오늘 복음에서 궁핍한 가운데 생활비를 모두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의 모습이 이 엄마에게서 보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소중한 당신의 목숨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매번 미사 때 이 사실을 기억합니다. ‘내 살이다 받아먹어라. 내 피다 받아마셔라.’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간도 봉헌해야 합니다. 시간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기도하는 것은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처럼 가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주님께 우리는 무엇을 얼마만큼 봉헌합니까?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쓰는 시간은 하느님께 바칠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는 쓰는 시간은 죽음으로 무(無) 가 되지만, 하느님께 바치는 시간은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