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
1독서 2열왕 4,42-44
2독서 에페 4,1-6
복음 요한 6,1-15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복음. 요한 6,9)
예수님을 따라온 군중들은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으니 여자들 어린이들 다 합치면 만 명 정도는 되었을 듯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림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대답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이미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일이 앞에 닥치니 예수님의 능력을 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고(요한 2, 1-11), 죽어가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셨으며(요한 4,43-54), 38년 동안 누워있던 벳자타 못 가의 병자를 일어서게(요한 5,5-9) 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 가운데에서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도 당신께서 하실 일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복음. 요한 6,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하게 하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당신께서 해 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 하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1독서. 2열왕 4,43) 엘리사가 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을 먹이라고 하자 그의 시종은 복음에서 보는 제자들과 똑 같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반응합니다. 사람에게 불가능하다고 하느님께도 불가능하다면 하느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에 비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것 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것의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의 하느님, 잠시라도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있는 것 조차 모르고 사는 공기의 하느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데도 그 존재 가치도 모르는 영혼의 하느님,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맞이하게 되지만 그 날이 언제 일지 도무지 모르는 죽음의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모든 것 안에 존재하시고, 모든 것과 더불어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2독서. 에페 4,6)
하느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가 될 때 모든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우리를 분리시키는 고통과 죄, 죽음 까지도 하느님 안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 되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2독서. 에페 4,1-3) 우리는 세례 때에 성령의 힘으로 일치를 이루는 은총을 이미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느님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끈과 같습니다. 나의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하느님과 연결되면 내 삶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터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오천 명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드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삶이 아무리 힘들고 궁핍하더라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마련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하다고 허덕이게 되고, 감사하면 아무리 적게 가져도 풍요로움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