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
연중 제24주일
1독서 지혜 3,1-9
2독서 로마 8,31s-39
복 음 루카 9,23-26
한국 천주교회는 매우 독특한 환경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외국에서 선교사가 그 나라에 들어가서 교회를 이루었는데 한국에서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성직자없이 평신도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유교 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791년 신해박해 부터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무려 10,000여명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103위가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고 2014년 8월에 124위가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軍門梟首)로 순교를 했습니다. 그 때 나이가 26세였습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유학자인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며 다산 정약용의 조카입니다. 그는 20세 때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을 하다가 1839년 9월 22일에 순교했습니다.
순교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자들에게 최고 가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복음. 마태 9,23)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살다보면 사건, 사고, 억울한 일 등 내가 원하지 않는 일도 일어납니다.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고생을 하고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로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다섯 단계를 제시합니다. 죽음의 통지를 받았을 때, “뭐라고요? 나는 아닐거예요.” 라고 부정합니다. 다음 단계로, “왜 하필 내가?”라고 하면서 분노를 터뜨립니다.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안 되면 “하느님, 살려주신다면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라고 타협을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체념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생각에 우울해 집니다. 이제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죽음을 수용하는 5단계는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럴 때 신앙은 큰 힘을 줍니다.
신앙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감정적으로는 피하고 싶지만 의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일을 받아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이러한 삶이 파멸로 여겨지겠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1독서)
주어지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자기 혼자, 자기 좋을 대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밤은 필요 없고 항상 낮이기 만을 바라는 삶입니다. 생명은 밤과 낮이 교차되면서 유지됩니다. 밤이기만 하면 꽃이 피지 못하고 낮이기만 하면 사막이 됩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복음. 마태 9,24)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순교 성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순교자들이 극한의 고통 앞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어떤 이유가 있을 때 생기며, 그 이유란 ‘예수님 때문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굳세게 믿기 때문에 생명도 죽음도 의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 ‘예수님 때문에’라는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멸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실패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참고 인내하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교 영성을 사는 것입니다. 순교 영성은 지금 여기에서 온갖 억압을 넘어서서 부활을 사는 자유로움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