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1독서 바룩 5,1-9
2독서 필리 1,4-6.8-11
복음 루카 3,1-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복음. 루카 3,5)
대림절은 회개하고 속죄하면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과의 사이에서 깊은 골짜기가 생기고 높은 산과 언덕이 생겨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골짜기와 산은 우리가 주님께 가는 것도 어렵게 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는 것도 어렵게 합니다. 우리 안에 생긴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은 깎아내는 것이 회개와 속죄입니다.
회개는 아무 생각없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굳게 다짐한다고 해서 인간적인 능력만으로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님께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1독서. 바룩 5,7) 내 안에 있는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메워져 평지가 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내시고 먼저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의 회개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내 안에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2독서. 필리 1,6)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 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눈 내리는 밤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불을 끄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수도자인지라 찾아 온 사람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서 문을 열었습니다. 문 앞에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나병 환자가 추위에 떨며 서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얼어 죽을 것 같아서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죄송하지만 몸 좀 녹이고 가게 해 주십시오.” 프란치스코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가 없어서 나병 환자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못 했습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끼도 못 먹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내일 아침에 먹을 빵과 우유를 갖다 주었습니다. 식사 후 가려니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다시 부탁을 했습니다.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고 몹시 추워서 도저히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루 밤만 잘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프란치스코는 이만하면 충분하니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노라니 그럴 수가 없어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에게 침대를 내어 주고 프란치스코는 바닥에 누워 자려고 하는데 다시 나병 환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제가 몸이 얼어서 너무 춥습니다. 저와 함께 침대에서 자면 제가 좀 따뜻하겠습니다.”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웠습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예수님이 프란치스코를 찾아왔습니다. “프란치스코야, 나는 네가 사랑하는 예수란다. 네가 나를 이렇게 극진히 대해 주니 참으로 고맙다. 네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깜짝 놀라서 잠을 깼습니다. 어느 덧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같이 잤던 나병 환자는 온데간데없고, 냄새가 나던 침대에서는 향긋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아! 주님이셨군요. 부족한 저를 이렇게 찾아주셨군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평화의 기도’ 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평화의 기도’ 에 대한 이 이야기는 누가 지어 낸 이야기입니다. ‘평화의 기도’ 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문이 아니라, 1917년 작자 미상으로 프랑스어로 씌어진 기도문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랐던 복음의 사도이자 평화의 사도인 프란치스코 성인의 신심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문으로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참고로 프랑스 국립 박물관 연합(RMN)에 ‘나병 환자를 안는 성 프란치스코(귀스타브 모로 Gustav Moreau 作, 19세기)’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평화의 기도’ 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얻게 하소서. 주여,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참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내면에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의지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당신의 뜻을 포기하고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당신의 생각에서 아버지의 뜻으로 나아갔습니다.
주님께 의탁할 때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 발휘됩니다. 회개는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 해주시고 사람은 로봇처럼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나를 내어 드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필리피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2독서. 필리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