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수녀님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에 들어 가신지 석 달이 되어 간다. 엄마와 오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온 나에게 엄마의 빈 공간은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꼭 함께 사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라며 자책하지 않으려 애쓰는 내 모습에 쓴웃음이 난다.
엄마의 일과 중 중요한 부분이었던 뒷마당 가꾸는 일은 엄마의 부재로 인해 내 몫이 돼버렸다. 히비스커스, 장미, 앤젤스 트럼펫, 온갖 종류의 다육이들.. 자식 돌보듯 작은 가지라도 살리려는 엄마의 노력은 모든 나무와 꽃가지들을 끈으로 묶어 마치 성황당을 연상케 했다.
다 죽어가는 가지가 끈에 묶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 꼭 무당집 같아” 하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래도 생명인데 어떻게 죽이니?” 하던 엄마가 이해가 안 됐다. “ 죽는 것도 인생이야. 제발 좀 그냥 두세요.” 하지만 엄마는 꿈적도 안 하셨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앙상한 가지에 엮어 있던 색색의 끈들. 바람 부는 초 겨울, 색깔마저 바랜 끈들이 연출하는 처참함은 살아남으려는 몸짓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이대론 안 되겠어’ 하며 마음을 먹고 뒤뜰을 정리하기 시작 한건 두 달 전쯤이다. 넝쿨 장미의 무거운 몸을 지탱하는 쇠 꼬챙이를 과감히 제거하고 엮인 가지들을 몽땅 잘라 버렸다 그리고 뭉툭해진 밑동에게 말했다. "그동안 힘들었지? 인제 죽든지 살든지 니 맘대로 해라!".
그다음은 기우뚱하게 서있던 굵직한 몸통의 히비스커스 나무, 엄마의 끈들 덕분에 중심은 섰지만 수없이 엮어진 끈들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큰 가지를 지탱하는 끈들을 빼곤 가지 치듯 끈들을 잘라버렸다. 수년간의 엄마의 손길이 남아있는 끈들은 내 손끝에서 무참하게 잘라져 나갔다. 이젠 제멋대로 자라난 다육이들 차례다. 생명력이 좋아서 빈 땅을 꽉 채우던 얘들도 뽑아 버리고 더러는 자리를 옮겨주고 나니 마당은 전에보다 훨씬 넓어 보이고 시야도 확 트였다.
가끔 엄마가 집에 오셨다. 엄마는 왜 가지들을 다 쳐냈냐고 한 번도 물어보지 않으셨다. 가신 후엔 새로운 끈으로 묶인 가지들이 보이곤 했지만 왠지 전에 처럼 내눈에 거슬리진 않았다. 짧아진 오후의 햇 살 사이로 석 달전 엄마가 심은 부갠빌리아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아치형 틀 사이에 심은 나무의 가지는 아무리 틀에 올려놔도 바람 한번 불면 헝클어진 머리처럼 흩어져 내렸다.
‘그래도 끈은 안 돼’ 하며 완강히 거부했던 끈에 대한 나의 강박 관념은 드디어 깨지고 말았다. 선물을 받으면 포장했던 끈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놨던 엄마. 며칠 전 받은 선물에 포장됐던 연두색 끈을 돌돌 말아서 보관했던 내 모습이 바로 엄마의 모습일 줄이야..
저무는 겨울 햇살 사이로 연두색 끈으로 묶여 하늘을 향해 뻗은 진 보라색 부갠빌리아를 바라본다. 그 가지들은 엄마의 흔적이 여전히 우리 가족의 일상 안에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내가 여전히 엄마라는 끈에 묶여 살아가는 존재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