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사도 6, 9-10)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 27)
제게 익숙했던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리, 또 한 곳에서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새벽부터 긴장이 있었고, 2300명의 직원들 그리고 하루에 약 3천명이 넘는 환자들이 찾았던 곳에서 지내다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환경이 고요함을 선물해 주었고, 저만의 The way of spiritual life를 준비하고 또 찾아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어느분이 말씀하시는데 크게 공감을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저의 삶의 뿌리를 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자리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실체와 무신론을 벗삼아 지금의 삶의 즐거움을 쫓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질문없이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온전히 이해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루에 적어도 1시간 30분 정도는 여기 프로테스탄트 tv 체널도 보고, 동영상으로 여기 LA 교구 주교님 강의를 두차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외 영어 동영상 메모해가며... 요즘처럼 공부했다면... ^^ 하는 지난 시간을 성찰하며 아쉬움도 갖는데, 중요한 것은 El Camino, The way인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한달이 지나가는 요즘 내적 큰 기쁨은 그 답을 분명 찾은 것 같습니다. ^^
스테파노의 눈과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장면을 이냐시오 관상안에서 보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환희를 체험하실 것입니다. 스테파노에게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을 통해서 어떤 체험이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10절의 의미를 묵상의 주제로 분리시켜볼 수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의 참된 양식은 현세적 인간의 가난함, 불안함 그리고 세상적인 미성숙함, 아직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영혼의 사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도전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두려워하는가? 무엇이 자신을 가장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는지를, 또는 착각하도록 그동안 높은 담장을 쌓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부활의 시기지만 세상은 계속해서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한 주간 나는 어느 길위에 놓여있는지, 목적지는 분명한지 주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자신은 그안에서 맘껏 뛰노는 은총 충만한 한주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