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며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는 데이빗 본당 신부님의 초대를 받아 성당을 향하는 길은 왠지 불편한 마음이 앞섰다.
남편이 본당과 우리 한국 성당의 교류를 위한 코디네이터를 하고있기에 신부님이 본당 스텝분들과 함께 최신부님 그리고 우리 부부를 함께 초대하셨다.
48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을 같은 성당을 사용했지만 사실상의 교류는 거의 없었기에 본당의 미국 신부님과 교우들은 함께 사는 먼 이웃 같은 느낌이었다.
일년 전에 새로 부임하신 데이빗 신부님은 오십대 초반의 유머가 많고 주변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아우르시는 분이라고는 들었지만 어쩌다 주일날 마주치면 눈인사하는 정도의 사이여서 그리 내키는 자리가 아니었다.
성탄 추리의 하얀 불빛이 빨간 카펫과 잘 어울리는 접대실에 들어서자 데이빗 신부님은 활짝 웃으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처음 가까이서 뵌 신부님의 잘생긴 얼굴에 놀랐고 초대된 사람들에게 음식과 와인을 따르며 일일이 챙기실 때 놀랐고 애피타이저가 끝나고 아래층 부엌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간소하고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을 꼬박 하루를 준비해서 직접 만드셔서 열두명이나 되는 사람을 써브하시는 모습에 크게 놀랐다
맛은 우리만 먹어서 미안할 정도로 너무 맛있었고 소년처럼 끊임없이 웃음을 날리며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신부님이 아니라 막내 삼촌같은 분위기 였다.
함께 식사를 나눈 연세가 지긋하신 교수 신부님과 두분의 노수녀님, 음악을 한다는 청
년들 그리고 본당 사무일을 하는 직원들이 어우러져 나누는 대화는 동네 아줌마들 대화 수준에 이르는 평범한 일상에 관한 것들이었다.
식사후 각자의 집에서 쓰지않는 물건을 포장해서 가져와 번호표를 뽑아서 가져가는 white elephant 라는 게임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물이 맘에 들면 바꿀수 있는 융통성이 있긴 하지만 상대가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맘에 들면 뺏앗겨야 하는 이색적인 게임이었다.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나이대의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함께 즐기면서 웃고 떠드는 사이에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가버려 벽란로 촛불 아래 불빛을 받으며 서있는 동방박사 세분이 집을 향하는 별빛을 재촉하는것만 같았다.
우리네 정서와 너무 많이 다른 모습의 사제와 신자들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평행선을 함께 달리는듯한 편안함이 있어 부럽기도 했다.
설겆이가 잔뜩 싸인 부엌에서 그릇들을 정리하는 분주한 모습의 신부님을 뒤로 하고 나오는 밤공기는 오랫만에 내려준 빗님 덕분에 차갑게 얼굴을 때렸지만 유쾌하고 익살이 넘치는 신부님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엔 난로를 품은듯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아, 우리 최신부님이 내려주신 핸드드맆 커피가 있었다면 모두를 더욱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민 내 마음속엔 어느새 그윽한 원두커피의 향기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